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명나라 치하 [[여진족]]의 상황 === ||[youtube(BIk50JdhvuM)]|| || 단편 영화 <사르후> || [[여진족]]은 원래 [[말갈]]로 불리던 민족으로, 고구려 및 발해에 복속하고 있었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한 이후 민족적인 자각을 거쳐 [[1115년]] 생여진 완안부가 [[금나라]]를 세워 [[중원]]을 차지하고([[1127년]], '''[[정강의 변]]''') 한 때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금나라는 세워진지 119년만에 [[몽골 제국]]에게 멸망했고,([[1234년]]) 금나라를 지배하던 세력은 [[원나라]] 통치하의 중원에 머물러 있다가 한족에게 동화되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여진계 부족은 중원이 아니라 만주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북원]]을 격파하며 만주까지 올라온 명나라나 혹은 북진정책을 취하며 압록강-두만강 이남을 병탄하던 조선에 복속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문화수준이 낮은 데다가, 조선 및 명나라의 견제 때문에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별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명이나 조선과 교역하기도 하고, 가끔은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이때 [[명나라]]의 역사가들은 이들을 사는 곳과 생활 수준에 따라 나누어 길림성(吉林省)의 '''건주여진'''(建洲女眞), 흑룡강성(黑龙江省)의 '''해서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분류했다. 그러던 중 [[오이라트]]와 [[몽골]]에 시달리던[* 과거 오이라트에게는 [[토목의 변]]으로 영종 정통제가 포로로 잡혔고, 세종 가정제의 치세때 몽골 튀메드부에 의해 수도 베이징이 포위당한 적이 있었다.([[경술의 변]])] 명나라는 [[여진족]]을 이용해 [[이이제이]]를 할 생각으로 그들에게 접근했는데, 이 중 [[요동]] 인근의 산지에 살며 당시 명나라의 기준으로 세 여진 부족 중 가장 문명화된 건주여진이 낙점되었다. 이에 [[1403년]] 후라가이(胡里改路, 호리개로)의 부족장 아하추(阿哈出, ? ~ 1411)가 명성조 [[영락제]]로부터 건주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지방 군사 지휘 조직의 총사령관이며, 정원은 1명]를 임명받았다. 이후 건주여진은 빠른 속도로 [[중국화|한화]]하여 영락제의 치세때부터 요동에 마(馬)시장이 열리게 되었고, 부족장들에게 성이나 지위와 함께 조공의 권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이에 명군이었던 효종 [[홍치제]](弘治帝)의 치세에 이르면 양측은 확연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외에도 명나라는 요동총관 [[이성량]]이 건주여진 뿐만 아니라 해서여진도 포함하여 나름의 위세를 떨친다는 인물 300명을 찾아 일일이 관직을 하사하고 [[조공]]의 권리, 즉 일종의 무역 허가증을 주었다. 여진족에게 있어 명나라와의 교역은 생존과 직결되는 요건이었고, 명나라는 300명에게 이 권한을 분산하여 이들이 서로 뭉치지 못하게하려고 했다. [[여진족]]들의 생활 양식은 [[몽골]] 및 [[몽골 고원]]에서 발흥한 여타 [[유목|유목민]]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유목은 주요 생업이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이들을 그저 '유목민'이라는 호칭으로 퉁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다. 여진족들은 주로 무순(撫順)[* 지금의 [[푸순]] 시] 등에서 수렵한 [[여우]], [[담비]], [[표범]], [[호랑이]], 바다수달, 강수달 등의 [[모피]]를 팔았고, 그보다는 [[인삼]]과 [[진주]] 등을 사용한 교역을 더 중요시했다. 또한, 이들은 지리적인 상황이나 기타 사정으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농업]]에 집중했다.''' >"서(墅[* [[농장]]의 조그만 집을 말한다.]) 가운데 일구지 않은 곳이 없고, 산 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많이 개간했다." >---- >신충일(申忠一)[* 생몰은 1554 ~ 1622, 조선의 무관 출신으로 당시 조정의 명령을 받고 여진족을 정탐한 인물이다. 꽤 소상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때 누르하치에게 절을 했다는 이유+임진왜란 중 전선을 이탈했다는 죄목이 더해져(정확하게는 오배삼고두, 즉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숙이는 것.) 탄핵되었다.] >"토지는 비요(肥饒=땅이 걸고 기름짐)하고, 화곡(禾穀=벼에 딸린 곡식의 총칭)은 심히 무성하다." >---- >이민환(李民寏) 《건주견문록》(建州見聞錄)[* 이민환은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해 강홍립과 함께 후금군에 붙잡힌 인물이다. 《건주견문록》은 이민환이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한 일을 시작으로 사르후 전투의 과정, 이후 17개월간 포로가 되어 목책(木柵) 속에 갇혀 지내다가 1620년에 조선으로 귀환할 때까지 견문한 일들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다. 생몰은 1573 ~ 1649] 물론 어느 정도의 [[유목]]을 하기는 했다. 이렇듯 여진 자체로서도 여러가지 면모가 공존하고 있는 지역에 원래 유목에 종사하던 [[몽골인|몽골족]], 이 시기부터 유입된 [[한족]] 농경민들까지 섞이다보니 이 지역은 민족적으로도 복잡했다. 건주여진이 중국과 우호관계일 때, 해서여진 역시 힘을 키웠다. 이들은 스스로를 '후룬'(扈倫, 呼倫, 忽剌溫, 忽溫)이라 부르며 야인여진은 물론 건주여진에 대해서도 일종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해서여진이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의 직계 후예였기 때문이었다. 해서여진 중에서도 예허부는 몽골의 혈통도 섞여서 여진족 중 가장 명문이었다.[* 정확히는 몽골 튀메드부의 싱언 다르한이 예허부에 들어와서 스스로 예허나라씨를 참칭했고, 이때부터 몽골족과 여진족이 혼혈된 반몽골 반여진부족이 되었다.] 이에 반해 건주여진은 방계 취급을 받는정도였다. 해서여진은 우라(烏拉), 후이파(輝發), 예허(葉赫), 하다(哈達)의 4개 부족으로 나뉘었다. 이중 전통적인 강자인 예허부가 주춤하던 사이, 하다부는 나라 왕타이(那拉 王台)[* 누르하치의 장인이기도 하다.]라는 유능한 수장의 통치 아래 명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되어 교역에서 우대를 받아 세력을 불렸으나, 왕타이가 죽고 난 뒤 혼란이 벌어져 다시 예허부가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허부는 반명적인 태도를 취해서 친명적인 하다부와 잦은 대립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건주여진의 한 집안에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